알렉산더 vs 포로스 | 진실이 밝혀지다 | 몇 세기 동안 속은 것 같아 | 키르티 역사
목차:
- 서론
-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정복
2.1 인도 정복의 배경
2.2 인도 도착과 포로스 대왕과의 전투
2.3 전투 결과와 알렉산더의 의도
-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정복에 대한 의문
3.1 그리스인 기록과 인도 기록의 차이
3.2 포로스 대왕의 기록 부재
3.3 세루코스 니카토르와의 관계
3.4 그 밖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
- 결론
- 참고 자료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정복
알렉산더 대왕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전해져온 이야기로 인도에 와서 포로스 대왕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포로스 대왕의 용맹함과 결단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 전쟁 이후에도 왕위를 반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 정복을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많은 헛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 것일까요? 실질적인 증거가 있는 건가요? 이 모든 것을 오늘 정리해보겠습니다.
2.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정복
2.1 인도 정복의 배경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인도로 향했습니다. 이에 대해 몇 개의 작은 인도 왕국은 그의 섭정을 받아들이고 알렉산더와 함께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탁샤실라의 암비입니다. 그러나 포로스 대왕은 이에 대항하여 싸우기를 원했고,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지금의 제헴 강(흘음 강)으로 불리는 하이다스페스 강 앞에서 알렉산더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때는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었기 때문에 강이 범람하여 알렉산더는 강을 건너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상황이 위험했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절반의 군대를 그곳에 남기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2.2 인도 도착과 포로스 대왕과의 전투
알렉산더의 절반 군대는 강을 건너 포로스 대왕의 동료였던 그의 아들을 가지고 그에게로 전투를 걸어왔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던 날씨 때문에 강변은 진흙으로 미끄러워 포로스 대왕의 병력은 군인과 병거들이 진흙에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막혔습니다. 또한 포로스 대왕의 병력은 알렉산더의 군대의 절반에 비해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쉽게 이길 수 있었고, 포로스 대왕의 아들을 죽이고 말없이 신속하게 포로스의 병력을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알렉산더는 더 많은 병력과 함께 포로스 대왕의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전진했습니다. 포로스 대왕도 방어적인 포지션에 서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3 전투 결과와 알렉산더의 의도
알렉산더가 포로스 대왕의 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걸음이 둔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는 포로스 대왕이 200마리의 코끼리를 이용한 전투를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코끼리들은 알렉산더의 병사들을 밟아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코끼리들이 우세했지만, 알렉산더의 병사들은 창으로 코끼리의 다리를 공격하며 전투에서 우위를 점차 가져갔습니다. 결국 코끼리들은 뒷걸음질을 하며 자신들의 병사들을 짓밟게 되었습니다. 이때 알렉산더의 나머지 군대는 강을 건너와 뒤에서 포로스 대왕의 병력을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포로스 대왕의 병력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저항하며 싸우기를 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포로스 대왕의 용맹함에 깊이 감명받아 그를 살려두기로 결정했으며, 그에게 어떻게 대우할지 물었습니다. 포로스 대왕은 "왕처럼 대하길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알렉산더는 대왕의 용기와 결단력에 깊이 감동받아 전투에서 이긴 후에도 포로스 대왕에게 왕위를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알렉산더는 병사들이 지쳐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래 목표였던 세계 정복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는 좋아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그리스인의 서사이기 때문에 완전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의 역사학자들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도인들은 인도의 기록이나 출처가 이러한 전쟁이 있었다고 주장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인도의 기록에는 알렉산더나 포로스 대왕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그리스인들의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탁샤실라와 같은 인도의 중요한 장소에서 이러한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때는 세계 최고의 고대 대학이었고, 전 세계에서 1만 명 이상의 학자들이 공부하였습니다. 게다가 전투에서 알렉산더와 동맹한 암비는 탁샤실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기록에는 이러한 전투나 이러한 왕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합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이상하죠.
우리에게는 셀루코스 니카토르의 기록이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셀루코스 니카토르도 몇 년 후에 다시 인도로 침공했고, 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셀루코스 니카토르가 찬드라구타 마우리아 왕과 동맹을 맺은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알렉산더에 대한 기록은 없을까요? 이럴 수도 있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왜 이 전투에 대한 인도의 기록이 없을까요? 아마도 인도의 다른 지역은 북서부와 그 지역부터는 연락이 적었을 수도 있을까요? 그렇다면 북서부와 기타 지역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의 북서부 지역인 간닷하라와 탁샤실라는 심지어 카우르 왕국도에게도 다양한 언어로 거래가 이루어졌고, 분명히 이러한 지역 사이에는 연결이 있었을 것입니다. 외국인 왕들을 포함하지 않은 전투 기록에 대한 기록이 없을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요? 이 역시도 가능성이 낮습니다. 알렉산더 침공 이후 단 5년 만에 마우리아 왕조는 세력을 확장했음에도 이 전투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의견으로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이러한 전투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는 그릇된 어린왕자 외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기록들도 주요한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인도의 학자들이 이러한 전투와 알렉산더의 침공을 무시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이 지역외에도 더 큰 왕국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가능성이 낮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전 전투는 있었을 것이며, 알렉산더는 실패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의 가장 좋아하는 말자기인 부체팔루스가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렉산더가 자신의 형제처럼 대접했다고 할 만큼 관대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포로스 대왕을 도망쳐 물리치고 왕위를 치환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더는 세계 정복을 위한 임무를 갖고 있었고, 그의 병사들이 지쳐 있어도 그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병사가 부족하다면 그는 큰 왕국을 정복하게 되었으며, 이미 약속된 경마성인 부체팔루스도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더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고, 이는 이 전투로 인해 입은 부상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실질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계속해서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이 문서는 OpenAI GPT-3 모델을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